제104주년 3·1절을 맞은 지난 3월 1일 광주광역시 광산구 월곡동에서 고려인마을 주민과 광산구 공직자들이 1923년 연해주 3·1만세운동을 재현하며 거리행진을 하고 있다. photo 뉴시스
제104주년 3·1절을 맞은 지난 3월 1일 광주광역시 광산구 월곡동에서 고려인마을 주민과 광산구 공직자들이 1923년 연해주 3·1만세운동을 재현하며 거리행진을 하고 있다. photo 뉴시스

세상에는 자신이 태어나고 자란 모국을 어떤 이유에서건 떠나 외국에서 사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다. 그들을 일러 조금은 생경한 단어인 ‘디아스포라(diaspora)’라고 부른다. 어원은 자신의 선택이 아니라 강제로 모국에서 살지 못하고 수천 년을 떠돈 유대인 같은 이들을 이르는 말이었으나 이제는 세계의 모든 실향민, 이주민들을 그렇게 부른다. 필자와 같이 해외에 정주해 살고 있는 자발적인 이민자도 여기에 해당될 듯하다.

우리 민족에게도 이 디아스포라에 해당하는 동족이 세계 여기저기에 살고 있다. 특히 이웃 나라인 러시아, 중국, 일본에는 역사의 아픈 파편을 맞아 어쩔 수 없이 수 대에 걸쳐 살고 있는 우리 동족들이 아직도 많다. 재외동포 700만여명 중 재중국 동포 220만여명, 재러시아 동포 50만여명, 재일본 동포 70만여명 역시 엄격한 의미로 디아스포라라고 해야 마땅할 듯하다.

 

소련에 살던 여섯 부류의 동포들

필자에게는 디아스포라라는 단어를 들으면 제일 먼저 ‘고려인’이라고 불리길 원하는 재로한인(在露韓人)들이 떠오른다. 필자가 구소련에서 한창 활동을 하던 1990년대에는 정말 여러 부류의 한인들이 현지에 살고 있었다. 이들을 크게 구분하면 고려인, 한국인, 조선인, 해외동포, 조선족, 사할린 동포 등 6개로 나눌 수 있었다. 고려인은 소련에 대대로 살고 있는 사람이고 한국인은 남한인, 조선인은 북한인, 조선족은 중국에서 온 동포를 칭했다. 사할린 동포는 소련 본토에 살고 있는 고려인과는 출신 성분이 다르다는 점에서 구분됐다. 그리고 해외에 살면서 소련으로 사업을 하러 온 필자 같은 한인이 해외동포였다.

이 중 사할린 출신 동포들은 대개 2세대들이라 우리 말이 약간 서투르기는 하나 그래도 소통에는 문제가 없을 정도였다. 거기다가 자신의 정체성이 한국인임을 분명히 인식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그들의 부모나 조부모가 대개 남한에서 건너왔기 때문이다. 일제 때 징용으로 왔다가 일제가 패망하면서 소련군이 진주하는 바람에 사할린 탈출의 기회를 놓친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들은 소련 시절만 해도 남한으로의 귀환을 감히 꿈도 못 꾸고 있었다. 1세대의 대다수는 소련 국적을 받으면 한국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이유 때문에 무국적자로 거주 신고만 하고 살았다.

당시 카자흐스탄과 우즈베키스탄에서 주로 살던 고려인들은 그 숫자가 무려 50만명이나 됐다. 이들은 1860년대 초 무렵부터 러시아 제국령 프리모르스키주로 대거 이주해서 살기 시작했는데, 당시 소련인들의 신분증에 반드시 표기하게 되어 있던 민족 구분란에 이들은 러시아 말로 ‘카레이스키(Кореéйский)’라고 적었다. 이들은 한·소 수교 이후 쏟아져 들어오던 남한의 한국인과 그전부터 있던 북한의 조선인들 사이에서 자신들은 한국인, 조선인이라고 부를 수 없다면서 고려인이라는 호칭을 썼다. 이는 중립의 표현으로도 안성맞춤이었다.

이들이 주로 카자흐스탄과 우즈베키스탄에 많이 살고 있던 이유는 1937년에서 1939년 사이 스탈린이 소련 극동지역에 살던 17만2000명의 고려인들을 강제 이주시켰기 때문이다. 한반도 인근에 두면 일본의 첩자가 될 수 있다는 우려 때문에 9월 어느날 갑자기 경찰이 들이닥쳐 길게는 7일, 짧게는 3일 만에 이삿짐을 싸라고 명령하고는 강제 이주 열차에 실어서 한 달간 6500㎞를 달려 카자흐스탄과 우즈베키스탄 허허벌판에 이들을 부려놓았다. 당시 한 달의 여행 기간 동안 약 1만1000~1만6000명 정도의 고려인이 사망했다고 한다. 그들은 무덤도 없이 그냥 길가에 버려졌다. 이들은 아무 준비 없이 온 황무지에서 맨손으로 땅을 파 토굴을 만들어 살면서 맨손으로 개간을 시작했다. 하지만 바로 들이닥친 겨울을 못 나고 또 수많은 고려인이 숨졌다.

1990년대 생활전선에서 활약하던 고려인 2~3세들은 어렵게 살면서도 ‘고려신문’이라는 신문도 발행하고 문학잡지도 내고 했다. 2015년에는 강제이주 150주년 기념식도 여는 등 나름대로 정체성을 이어가려는 눈물겨운 노력을 지금도 하고 있다. 심지어 사할린에는 1949년에 창간된 ‘새고려신문’이 아직도 발간되고 있다. 주간으로 발간되는 이 신문은 지난 7월 28일 자로 1만2046호를 기록했다. 1956년부터 우리말 라디오 방송국도 운영됐는데 안타깝게도 2009년 문을 닫았다. 다행히 TV 방송은 2004년에 시작되어 지금도 유지되고 있다. 현대홈쇼핑의 도움을 받아 유지되고 있다고 한다. 이들은 어려움 속에서도 한민족이라는 정체성을 유지하려는 피나는 노력을 해왔다.

1990년 당시 고려인들은 우즈베키스탄에 가장 많은 17만6000명이 살고 있었고, 이어 러시아에 15만명, 카자흐스탄에 10만명, 사할린에 4만명, 키르기스스탄에 1만5000명, 우크라이나에 1만3000명, 타지키스탄에 6000명, 투르크메니스탄에 3000명이 살고 있었다. 물론 기타 공화국에도 소수이긴 하지만 여기저기에 뿌리를 내리고 살고 있었다. 예컨대 발틱 3국 중 하나인 에스토니아 수도 탈린에도 고려인이 하는 한식당이 있다. 심지어 필자는 핀란드와 러시아 접경 지역에 위치한 오네가 호수 내의 아름다운 목조 사원(Kizhi Pogost)이 있는 기지섬(Kizhi)으로 가는 동네에서도 고려인이 하는 한식당을 발견하고는 기절초풍한 적이 있었다. 거기는 모스크바에서 무려 900㎞나 떨어진 인구도 몇 명 안 되는 조그만 시골 마을이었다. 더군다나 목조로 된 식당 벽에 태극기가 걸려 있어서 흡사 영화에 나오던 일제 강점기 때 만주 독립군 본부를 연상시키는 분위기가 서려 있었다.

지난 3월 17일 러시아 사할린 영주 귀국 동포들이 강원 동해시 동해항 국제여객터미널에서 정부 관계자들의 설명을 듣고 있다. photo 뉴시스
지난 3월 17일 러시아 사할린 영주 귀국 동포들이 강원 동해시 동해항 국제여객터미널에서 정부 관계자들의 설명을 듣고 있다. photo 뉴시스

모국을 빼닮은 교육열

당시 필자는 소련에서 지방 출장을 가서 어려운 일을 당하거나 한국 음식을 먹고 싶으면 동네 장터로 갔다. 거기에 가면 백김치로 불러야 마땅한 김치를 파는 고려인이 반드시 있었다. 그들은 양배추를 소금에 절여 고춧가루 없이 그냥 마늘만 넣어서 ‘짐치’라고 부르면서 팔고 있었다. 러시아인들도 김치를 상당히 좋아해서 잘 팔렸는데 덕분에 러시아 내 어디를 가든 반드시 고려인이 김치를 팔고 있었다.

고려인들은 당시 평균 러시아인들보다 훨씬 더 잘살았고 고등교육을 받은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나름대로 여러 분야에서 자리를 잡고 있어서인지 해당 지방에서 상당한 인맥도 갖고 있었다. 필자는 그들을 통해 사업에 필요한 영향력 있는 유력 인사나 기관 담당자를 연결받아 많은 도움을 받기도 했다.

처음 고려인들을 만났을 때부터 궁금한 점이 눈에 띄었다. 대부분의 고려인들이 지식산업에 종사한다는 사실이었다. 공학이나 기술 관련 전공자라고 해도 현장이 아니라 반드시 연구소에 근무하거나 정부 기관 사무실에서 일하고 있었다. 현장 일보다는 책상에서 일하는 걸 선호하는 모습을 보면서 ‘피는 못 속이는구나’ 하는 생각을 많이 했었다.

더 놀라운 점은 자녀교육열이었다. 자녀들 교육에 온갖 정성을 들여 자신의 분수를 넘어설 정도로 지원했다. 거기다가 반드시 악기 한두 개는 가르친다는 점도 한국의 부모들과 똑같았다. 한국과 반세기 이상 단절되어 전혀 교류가 없었는데도 자식 교육을 위해서는 물불을 안 가리고 자신을 희생하는 자세는 똑같았다. 

또 다른 놀라운 점은 뛰어난 기업가 정신이었다. 당시 막 싹트기 시작한 시장경제가 자리 잡기 이전인데도 이들의 도전정신은 대단했다. 필자와 파트너가 되어 한국에서 들여온 소비제품 도매를 전담했던 고려인 형제는 당시 벌써 상당한 부를 축적하고 있었다. 이들은 자신들이 일하던 집단농장에서 농장 책임자의 허락하에 농장 일부를 독립 경작했다. 비록 이들이 경작하던 농장 크기는 전체의 4분의1에 불과했지만 거기서 나오는 양파 수확량은 농장 전체의 수확량과 같았다. 면적당 생산량으로 따지면 무려 4배에 해당하는 생산을 한 셈이다. 이들은 수확량의 반을 농장에 주고도 자신들 연봉의 10배에 해당하는 수입을 거두었다고 자랑했다. 농장 책임자는 아무것도 안 해도 이전 생산량에 비해 2배 수확량에 해당하는 양파를 받았으니 입이 찢어질 수밖에 없었다. 

당시 고려인의 말을 들으면 대개 함경도 사투리의 억양과 단어가 많이 섞여 있었다. 가끔 경상도 말처럼 들리기도 했는데, 조선 말기 경상도에서 가렴주구가 심해 함경도로 야반도주한 사람들이 많아서 두 지방 사투리가 비슷하다는 속설이 맞다는 생각도 들었다. ‘짐치(김치), 딘장(된장), 장물(간장), 배차(배추), 지름(기름), 마이(많이)’ 등은 완벽하게 경상도 사투리이다. 숫자를 세는 하나, 두리(둘), 서이(셋), 너이(넷), 다(다섯), 여(여섯)는 경상도 특히 안동 지방 사투리이다.

당시 영국 소아스대학교(SOAS· School of Asia & African Study)의 한국어 전문 연구학자 로스 킹 교수가 70년 이상 고립된 소련 동포들이 쓰는 한국어를 조사하러 다니곤 했다. 그는 언어가 하루가 다르게 변화하는 남북한과 격리된 채 살아온 고려인들의 조선어가 한국의 영향으로 변화하기 전 조사해서 기록으로 남기겠다고 했다. 

 

모국으로 이주하는 고려인들

2021년 9월 고려동포특별법이 국회를 통과해 발효되었다. 3·1운동 및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아 고려인을 비롯한 모든 재외동포 범위를 현행 3세대에서 4세대로 확대하는 법이었다. 지난 6월에는 고려인 동포 합법적 체류자격 취득 및 정착지원을 위한 특별법도 시행되었다. 고려인동포법이라 불리는 특별법은 1860년 무렵부터 1945년 8월 15일까지의 시기에 농업이민, 항일독립운동, 강제동원 등으로 러시아 및 구소련 지역으로 이주한 자 및 민법 제777조에 따른 그 친족으로 현재 해당 지역에 거주하고 있는 자들의 합법적인 거주국 체류자격 취득 및 생활안정 지원을 위한 정책을 수립·시행하고 관련 국가와의 협력 등 외교적 노력을 하기 위한 법이다. 이 법은 또한 각종 이유로 구소련에 무국적으로 주거해온 고려인 동포들의 한국 국적 혹은 주거 국가 국적 취득을 대한민국 정부가 지원하는 법이기도 하다. 사할린에만 무려 2만여명의 무국적자가 있고 국내에는 고려인 4세 청소년들이 5000여명 있는데, 이들의 한국 내 정착 지원을 위해 한국어 교육과 함께 각종 지원이 시행되고 있다. 광주광역시 광산구 월곡동에는 귀환 고려인 정착촌도 있다. 귀환 고려인뿐만 아니라 인근 하남공단 이주 근로자들도 거주하면서 현재 2만3000명이 넘는 꽤 큰 마을로 발전했다. 지난 2017년 강제이주 80주년을 맞아 첫 고려인 축제도 여는 등 본격적으로 한국 정착을 시도하는 중이다.

최근 몇 년간 이뤄진 고려인의 귀향 물결을 보면서 1980~1990년대 소련 내 유대인 귀향 물결을 떠올렸다. 소련 내에서 학력이 높고 사회적 지위도 탄탄했던 유대인들은 굳이 이스라엘로 이주할 필요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대다수가 이스라엘로 귀환을 진지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심지어는 이스라엘 언어도 못하는 사람들이 이스라엘로 이주를 계획하고 있었다. 이유는 바로 정체성 때문이었다. 아무리 오래 살아도 뭔가 결핍을 느끼고 있었다는 말이다.

1970년 소련 내 유대인들이 벌인 이스라엘 이민 운동을 유대인들은 ‘알리야(aliyah)’라고 불렀다. 본래 의미는 상승, 등반 등의 의미를 가지고 있는데 성스러운 도시인 예루살렘의 궁전이 있는 언덕을 올라간다는 뜻이다. 당시는 물론 지금도 이스라엘은 세계 어디에 있든 유대인의 후손이라는 걸 증명만 하면 모두 받아준다. 그 결과 소련 내 160만명의 유대인 중 61%인 100만명이 이스라엘로 이민을 갔다. 당시 정통 유대교 논리를 따르면 그중 26%는 엄격한 의미로는 유대인이 아니라고 했지만 1950년 제정된 귀환법(Law of Return)에 의해 이스라엘은 일단 받아들였다. 당시 아랍에 비해 인구와 기술자가 부족했던 이스라엘은 기술과 지식을 가진 동포들이 온다니 두 손을 들고 환영했다. 오히려 소련 정부에 각종 당근을 내밀면서 소련 유대인의 출국을 용이하게 하는 법을 소련이 만들도록 설득했다.

 

해외 동포 자녀들이 우리의 자산이다

이런 유대인의 동포 유입 전략을 본 필자로서는 현재 한국이 처해 있는 저출산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의 하나로 러시아 거주 고려인 후손들을 비롯해 해외 동포들의 적극적인 유입 전략을 권하고 싶다. 이미 경상북도(도지사 이철우) 등 이런 움직임에 앞장서는 지자체들도 있는 듯하다. 경북 김천고등학교가 고등학교로는 처음으로 해외 유학생을 받아 교육시키고 정착을 유도하려는 시도를 시작했다는 조선일보 보도를 보았다. 

필자는 최근 경상북도 주도로 고도원 아침편지문화재단 이사장과 양향자 국회의원 등이 만든 ‘K-디아스포라 세계연대’에서 주최하는 ‘K-디아스포라 한국여행 1기(KDIA·Korean Diaspora Inspiration Adventure)’에 영국 교민 청년 3명을 추천해서 보낸 바 있다. 지난 8월 24일~9월 2일 9박10일에 걸쳐 열리는 이 행사의 목적은 ‘전 세계에 살고 있는 한인 청년들에게 한인으로 새로운 비전을 품을 수 있는 기회를 주겠다’는 것이다. 이스라엘의 경우 동포청년들을 불러들이기 위해 ‘출생 권리(Birth Right)’라는 제도를 만들어 유대인 피를 가진 청소년 누구든 일생에 한 번은 모국을 방문하게 하고 있다. ‘K-디아스포라 세계연대’도 더욱 성장해 해외 한인 청소년 모두가 한 번은 한국을 방문하는 기회를 갖게 하기를 바란다.

현재 해외에는 193개국에 700만명의 우리 동포들이 살고 있다. 그중에서 9~30세 사이의 2·3세 청소년과 청년들은 약 200만명으로 추산된다. 그런 청소년들을 불러들여 한국의 미래에 도움이 되게 만들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유승준’으로 인해 각박해진 해외 동포 자녀들의 병역문제에 대한 해결책도 있어야 한다. 전 가족이 이주해 해외에서 태어난 청년들이 한국에서 근무하기 위해 받아야 하는 재외동포비자 F4는 부모 중 한 명은 반드시 외국 여권을 가지고 있어야 하며 해당 청년은 외국 국적자여야 한다. 결국 대다수의 해외 동포 청년은 한국 여권을 포기하고 외국 여권으로 한국에서 일을 해야 하는 모순을 만들어내고 있다. 지금도 한국 병무청을 상대로 소송을 벌이고 있는 유승준씨가 자신 때문에 수만 명의 해외 동포 청년들이 고통받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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